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독일 제국]] [[작센 왕국]] [[바우첸]]에서 태어났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에도 참여했었던 라인하르트는 군에 남아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을 알렸던 [[폴란드 침공]]에서 4기갑사단을 이끌었다. 폴란드 침공의 성공 이후 [[프랑스 침공]]에서는 41차량화부대를 재편한 41기갑군단의 초대 군단장으로써 전역에서 활약하였다. 라인하르트가 이끌었던 41기갑군단은 [[아르덴|아르덴 숲]]을 통과했던 부대로써 현재 프랑스의 [[오드프랑스]]의 애비빌까지 진격하였다. 프랑스 전역이 끝나고 1941년, [[바르바로사 작전]]이 전개되면서 라인하르트는 동부 전선으로 이동되었다. 중부집단군 지휘 아래의 3기갑군(사령관 [[헤르만 호트]] 상급대장)에 예속되어진 41기갑군단을 이끌었고 [[레닌그라드]] 교외 지역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였다. 점령지에서 라인하르트는 수뇌부에서 내려진 [[정치장교 명령]](Kommissarbefehl)─소련 정치장교에 대한 즉결 처형─을 충실히 수행하였다. 또한 나치 독일의 장애인 정책에 따라서 [[쾨니히스베르크]]에서 정신질환자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. 같은 해 10월에는 3기갑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[[모스크바 공방전|태풍 작전]]에 투입되었으나 겨울이 되는 바람에 라인하르트의 부대를 포함, 작전에 투입된 대부분의 부대들이 퇴각한다. 전선을 뒤로 물려놓았을 시점에 라인하르트가 이끌었던 3기갑군은 [[벨로루시|비텝스크]]와 [[스몰렌스크]]에 주둔하고 있었다. 이때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가 이끌던 보안방첩국(Sicherheitsdienst)과 협업하여 유대인 사회의 붕괴를 위한 유대인 이송 및 학살에 동참하였다. 이후 1944년 [[바그라티온 작전]]이 전개되면서 대대적인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중부집단군이 거의 와해되기 시작하였다. 이때 긴급히 투입된 [[발터 모델]] 원수가 기존의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과 중부 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며 동부전선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. 하지만 ~~동쪽을 막고나니~~ 서부 전선 또한 전선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에, 모델 원수는 서부전선 총사령관 겸 B집단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모델의 후임으로 라인하르트가 중부집단군을 지휘하게 된다. 하지만 소련의 공세 자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동부전선은 [[슐레지엔]] 지역까지 몰리게 된다. 1945년 1월에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종전 후 미군에 체포되어 [[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]]에 회부, 동부전선에서의 유대인 학살 등의 전쟁범죄의 책임을 물어 15년형을 선고받는다. 몇 번의 감형에 대한 논의 끝에 1952년에 석방되었다. 석방 이후 서독에서 군사·안보 등의 분야에서 일하였고 1962년 독일 연방 공화국 훈장을 수여받았다. 이듬해인 1963년에 [[바이에른]]주 테게른제에서 사망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